“울고 싶을 때가 있죠? 언제 가장 울고 싶습니까.” “항상 울고 싶습니다.” 이 짧은 두 마디의 문장을 단지 의미 전달의 측면에서만 보면, 한 개인의 고민상담 같아 보인다. 그렇다 ‘개인’의 고민 상담이 맞다. 그러나 이 문답 사이의 틈과 앞뒤 정황에 살이 붙고 구조적 맥락이 고려되면 전혀 다른 의미의 울림이 생긴다. 장-마르크 무투 감독의 <어느 날 아침>의 주인공 ‘폴’의 하루를 들여다보자.
이어지는 내용
이 글은 다음 명제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비평이라는 말을 들으면, 바로 판단이라든가 이성이라든가 냉안이라든가 하는 단어를 떠올리지만, 그와 동시에 애정이라든가 감동을 비평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평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고바야시 히데오)
‘아버지’가 ‘개’라고 한다. 이 도전적 명제의 사용은 제목과 텍스트를 연관시켜 서사를 넌지시 유추하게끔 만드는, 일종의 알고리즘을 유도하고 있다. 넘겨짚어 보면, 가족내 아버지의 절대적 권위가 개로 치환 될 만큼 비루하고 볼품없이 시들어가는 과정. 혹은 가족 이데올로기 속 존재하는 아버지라는 계급과 그 허울이 자행하는 ‘폭력’(의 물리적 학대가 개로 묘사)이 구성원들의 삶을 지탱하는, 처연한 삶의 관조적 태도정도가 번득 생각이 난다. 개인적으론 짐작 가능한 이 두 가지 추측이 영화와 멀어지면 질수록, <아버지는 개다>는 굉장한 울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탈주>는 체제를 움직이는 거대한 삶의 공식에 포섭되지 못한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5일간의 시간이 고발하는 ‘반쪽자리 세상’을 러닝타임 동안 묵직하게 비춘다. 도무지 공정하지 못한 삶, 생의 감각을 통째로 부정해야 비로소 죽음으로 자신의 존재가 증명되는, 타자화된 이들에 대한 서늘한 은유. 우리 모두가 묵인하는 ‘일상성’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던지는 영화에 관객은 어떠한 답변을 내 놓아야 하는가. <탈주>를 본 이상 도무지 극장 의자에 엉덩이를 진득하게 붙일 수 없게 만드는 불편한 지점을 다가올 내일처럼 마냥 넘길 수는 없다.
김지운은 직설적이지 않다.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결코 스크린에 투영하지 않는다. 철저히 가공된 어떠한 결과물로 ‘리얼리티’를 넌지시 드러낸다. 연출에 있어서 이런 일련의 경향은 <반칙왕>이후에 확연히 드러난다. 그의 세계는 점점 현실을 해체한다. 실재와의 개연성이 상실된 사건들, 장황한 풍경, 지나친 폭력성, 이질적 공간 등을 통해 무엇인가를 재구성한다. 이 지점에서 장르라 구분지어지는 영역들이 뒤섞이고, 김지운만의 영화로 불릴법한 몇몇 선명함이 드러난다.
‘꿈’속 흐릿한 잔상이 이어진다. 지각되는 사물들이 일그러지고 때론 확장된다. 구현되고 있는 미지의 세상은 <Lost>의 ‘섬’처럼 믿음을 현실의 이름으로 재현시킨다. 그 체계 속 우리는 굉장한 것들을 경험한다. ‘누구나’ 라는 보편성을 띈 꿈은 흔히 일상에서 회자된다. 잠들 무렵 ‘이미저리(imagery)’라는 줄거리가 없는 어렴풋한 영상이 의식의 수면위에 떠올라 현실과 비현실(꿈)의 문턱을 낮추면, 다음 정말 진짜 같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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